[스포츠투데이 한예지 기자] 몸서리칠 정도로 몹시 끔찍하다. 처절한 비극을 겪으며 자신 안의 짐승을 자각하고 회한과 분노로 꺽꺽대며 오열하는 남자의 잔상이란. 순간의 이미지가 뇌리에 깊게 박혀 경외감마저 느끼게 하는 배우 이성민이다. 하지만 그의 실상은 그저 수더분하고 사람 좋은 아저씨다. 그 차이가 괜스레 즐겁다.

정교하면서도 묵직한, 새로운 범주의 스릴러 영화 '비스트'(감독 이정호·제작 스튜디오앤뉴)를 직접 촬영했음에도 완성본을 보며 너무 움츠러들어 힘이 들었다는 이성민이다. 그럴 만도 했다. '비스트'는 범죄 스릴러를 표방하면서도 기존 장르물과는 궤를 달리하는 영화다. 인간의 복합적인 심리와 본성을 냉정한 온도를 유지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율배반한 감성을 오롯이 연기해내야만 했을 테다. 특히 이성민은 엄청난 감정의 진폭을 고스란히 뱉어내야 했다.

그가 맡은 강력반 에이스 한수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또다른 살인을 은폐한다. 이를 눈치챈 라이벌 형사 민태(유재명)에 쫓기며 점차 궁지에 몰린 그의 불안과 긴장, 점차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며 폭주하다 종국에 도달한 극한의 감정을 울부짖으며 토해냈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극한의 감정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핏줄이 터질 만큼 배역에 몰입해 열연한 이성민이다. 그럼에도 그는 "좀비처럼 실핏줄이 터지더라. 그런데 감독님은 '분장이에요?'라고 묻더라. 서운했다"고 너스레다. 이토록 복잡다단한 인물의 감정과 적나라한 본성의 밑바닥을 마주하고 온 이가 이리도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하지만 그 역시도 한수가 딱하고 가엾었다.

한수는 유능한 형사고, 실적도 많이 쌓은 베테랑이다. 흉악범을 잡아넣는 것에 집착하듯 보이는 건 한 번 꽂히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성격 때문일 테다. 승진에 대한 욕망보다는 빨리 제가 맡은 사건을 해결하고 싶은 욕심이 큰 인물이었다. 그게 한수의 출발이었다고 설명한 이성민은 "그러나 범인을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다. 그도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거다. 그렇게 사건을 해결하려다 곤경에 처하고 자신이 실수한 일그러진 것들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에 빠진다. 그러다 그 지경까지 가며 비극에 휘말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범인을 잡기 위해 내린 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극한으로 치닫게 되는 인물, 이성민은 여기에 이미 매력을 느꼈다. 특히 '베스트셀러'부터 '방황하는 칼날'까지 저와 함께한 이정호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만으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감독님이 어렵게 말씀하셔도 그 속뜻을 명료하게 알아들을 수 있다"며 감독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그는 이정호 감독 특유의 화법, 그의 한결같은 기조를 존중했다. 이성민은 "제가 감독님 전작에 나올 때까지만 해도 장르에 익숙한 배우가 아니었다. 그런데 제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끄집어내는 능력이 탁월하신 것 같다. 이번에도 제게 없는 '비스트' 같은 모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저를 쓰신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이어 "감독님의 구사하는 이야기나 구조들을 보면 늘 동전의 양면처럼 바라보는 느낌이다. '방황하는 칼날'에서 다룬 청소년 문제도 그렇다. 미성년자의 범죄는 용서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끊임없이 화두를 던지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비스트'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인물과 그들이 놓인 상황 속 양면의 변주를 이루며 누가 괴물인지를 묻는다. 이렇게 관객을 딜레마에 빠뜨려 혼란스럽게 만드는 감독의 화법에 이미 깊이 매료된 그였다.

일그러진 정의를 갖고 있는 인물, 욕망과 질투로 점철된 인물, 회피하고 외면하는 인물 등 극 중 인물들은 모두 내면의 '비스트'를 꺼내보였다.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내면의 짐승이 튀어나오고 이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는다. "누구나 마음속에 짐승 한 마리씩 키우고 있다잖아. 그게 언제 나타나는지가 문제일 뿐이지"라는 극 중 대사는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인간'답게 산다는 건, 꽤 쉽지 않은 일이다. 이에 대해 이성민은 "이성이 있고 사회 질서가 있고 사회 규범이 있고, 그리고 교육이란 것이 있다. 이런 것들로 본성과 본능을 자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살아가는 것이 사람 아닐까"라고 엷게 웃어 보였다.

이성민은 '비스트'에 대해 "약간 숨을 조심스럽게 쉬며 볼 수 있는 단단한 스릴러"라고 정의했다. 메시지는 가볍지 않지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라고. 그리고 의외로 생각보다 웃을 수 있는 장면이 몇 군데 있다고 귀띔했다. 한수는 제 살인 은폐 행위가 발각될까 마음 졸이고 있지만, 그가 반응하는 행위들은 극한까지 몰린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으로 오히려 여기서 조소가 터지는 식이다. 물론 이를 웃으며 즐기기엔 극의 분위기가 워낙 묵직하고 편치 않아 두어 번은 더 곱씹어야 하지만 말이다. 이성민은 "그 부분이 좀 아쉽긴 하다. 하지만 관객들이 얼마나 공감해주실지 궁금하다. 이를 느끼신다면 즐길 수 있는 맛이 있지 않을까"라고 기대했다.

특히 그는 '비스트'를 통해 배우로서 또 한 번의 깨달음을 얻었단다. 평소 자신 없었던, 망설였던 영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비스트'를 통해 인물이 가지는 공포, 감정, 심리를 제대로 진하게 보여주고 싶었고 저도 극단의 감정을 연기하는 경험을 했다. 제가 잘 안 가보던 지역으로 가본 느낌이다. 그리고 이를 겪고 배우로서 체득했단 생각"이라며 "저한테는 없었다고 생각했던 영역을 발견할 기회가 된 것"이라는 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배우로서 낯선 장르, 혹은 낯선 화법에 도전한다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할 테다. 이성민은 이를 "한 번 가기가 어렵지, 몇 번 가보면 그 영역은 내 영역이 되는 거고 다음부터 쉽게 갈 수 있다"고 했다. 배우가 두려움을 몸소 즐기며 체화하는 법이 아닐까.

앞서 전작 '공작'에서 인물이 놓인 장소의 공기까지 연기했고 이로 인해 각종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휩쓴 이성민이다. 그는 "스무 살 때 극단에 처음 들어가 지금까지 배우를 안 한 적이 없다. 늘 연극하며 배우로 살며 마음속에 있던 꿈을 이뤘다. 그런데 뭐랄까. 기분이 좋다기보단 허탈한 마음도 들었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지금은 편안해졌다"고 털어놨다. "연기는 절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제가 연기할 수 있는 토대는 훌륭한 작품이고, 이를 완성하는 건 감독과 스태프, 동료 배우들 덕분이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요즘은 좀 덜 외롭고 덜 힘들다"는 그였다.

그 이상이 또 있을까 싶을 때 매번 그는 스스로의 범주를 넓힌다. 경이로움을 넘어 경외롭다. 하지만 이성민은 "백상에서 상을 받고 집에 돌아간 날도 바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좀 전에 tv에서 보던 사람이 접니다'라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며 사람 좋은 너털웃음이다. 요즘 최대 고민은 고3이라 많이 힘들어하는 딸이 행복하길 바라는 아빠의 마음이다. 딸이 행복하다면 가장 즐겁다는 그다. 괴물 같은 연기력을 가진 배우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때, 이보다 더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하는 순간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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