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한예지 기자] 안개에 싸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는 배우 유재명의 비유는 꽤 운치 있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안개를 뚫고 걸어 들어간 곳에서 그는 어렴풋이 답을 찾아나갔다. 그렇게 완성된 영화 '비스트' 속 민태였다.

'비스트'에서 유재명이 맡은 캐릭터 민태는 퍽 의아하다. 감정의 서스펜스를 극대화하는 인물임에도 분명 쉽게 잡히지 않는 캐릭터이다. 원칙을 최우선으로 하는 강력반 형사이고 냉철하고 반듯한 듯 보여도, 2인자로서 느끼는 좌절과 분노 이를 넘은 폭주와 욕망을 차갑게 드러낸다. 유재명은 이를 두고 "좀 어려웠다"고 했다. 작품이 어렵다기보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고, 기본적인 서사인 듯하면서 풀어가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이를 "낯설었다"고 다시 정의한 그였다.

모든 인물의 감정이 극한까지 치닫는데 그 극한이 어디까지인지 감이 안 잡혔다. 그래서 궁금했고, 안갯속에 싸여있는 민태 캐릭터를 알고 싶단 묘한 매력을 느꼈다고.

극 중 유재명은 라이벌이자 강력반 에이스 한수 역의 이성민과 사사건건 대립한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적대시하고, 한수의 약점을 잡은 후부터 그를 궁지로 몰아넣으며 끊임없이 미묘한 심리전을 펼친다. 유재명은 민태의 행위에 대해 "드러내지 않으면서 드러나는 디테일을 표현해야 했다. 민태는 상대의 호의에도 고마워하기보단 자존심이 발동하고 자의식이 발동한다"고 설명했다.

유재명은 "민태의 본성이 상투적이지 않았다. 동료에 대한 질투심이 일차원적인 감정을 넘어 본성을 건드리더라. 태생적으로 '난 걔가 싫어'다. 이유가 없다. 독단적 행동을 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해도 맺지 못하고 있다. 합리적인 행동을 한다고 하지만, 이기적이고 욕망적인 모습들이 보였다"고 했다. 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사람이고 괴물 같으면서도 지극히 인간적이었다고. 그는 이런 인물을 접하고 단정 지을 수 없는, 해석할 수 없는 기이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배우들은 이런 막막함 속에 재미를 느낀다"는 그는 천생 배우다. 오히려 막막한 인물이라 욕심이 생겼고, 불면의 밤을 거쳐 탄생하는 예술작업처럼 여겨졌다는 멋들어진 비유를 하는 그였다. 사실 촬영장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단다. 그는 "감독님이 자기 생각이 확실하지만 충돌을 좋아하신다. 이성민 선배나 저의 의견, 촬영 감독님의 의견 등 각자의 의견이 자유롭게 나오고 이에 대해 기분 좋은 논쟁을 하고 수용을 하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실 이정호 감독이 누군지 몰랐다. 전작들부터 일관된 기조로 인간 내면의 복합적인 심리를 담아온 감독의 세계관도 당연히 짐작 못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선입견 없이 그에게 주어진 이야기를 감독과 나누고 집중했던 것 같다고. 또한 개개인의 선택이 모여 시작된 촬영 현장에서 각자의 부족함과 갈증을 같이 공유하고 나누는 과정도 그저 좋았단다.

'비스트' 촬영 현장은 이렇듯 이야기의 구조가 만들어낸 서사에 기대어 가는 영화가 아니고, 인물이 중심이 되는 영화였기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인물의 내밀한 디테일을 찾아가는 것에 중점을 뒀다. 유재명은 이를 두고 "이야기 구조로 풀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현실적이고 친절한 서사가 생략되거나 과감히 배제된 채 극한의 감정을 보여주는데 배우로서 인물이 중심이 돼 서사에 기대지 않고 상투성에 빠지지 않으며 내밀한 디테일을 찾아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고 평가했다.

유재명이 안개를 걷고 찾은 민태는 진실된 척 하지만 악하고, 그러면서도 나약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그가 느끼길 '비스트' 또한 그런 영화였다. 극의 모든 인물은 '비스트'의 모습을 드러낸다. 극 내내 객관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여형사 미영만 봐도 그렇다. 유재명은 그를 두고 "그냥 도망친다. 이 또한 괴물의 모습이다. 적극적 건의를 하거나, 그 중심이 돼 주체성을 발휘하지 않고 그냥 진실된 척하는 비아냥을 남기고 사라진다. 가장 현실적인 모습 아닌가"라고 했다. 이처럼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 지적인 척 하면서도 실은 짐승 같은 본성을 이토록 까발린 영화가 또 있었겠나. 유재명은 이런 관점으로만 봐도 기존 관성을 벗어나 '비스트'가 가고자 하는 길을 확실하게 걸은 것 같다고 자평했다. 그렇기에 민태가 보인 마지막 표정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개운한지, 쓸쓸한지, 자신 안의 짐승의 모습을 직시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며 회상에 잠긴 유재명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인간과 관계에 대해 더 깊이 고찰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떤 사람에게 모든 장막을 거둬내고 진실된 뉘앙스로 눈을 마주치고 도움을 요청하면 소통이 될 거다. 그게 안 되는 이유는 이를 진심이 아니라고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지 않나. 그래서 인간은 겉으론 정의로운 듯하면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단적이 되는 게 아닐까." 잠시 상념에 빠진 그 모습이 운치 있다. 연기를 통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깊은 사유를 스스로에게 이끌어내는 그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의 시선과 관념도 확장되는 것일 테다.

유재명이 꿈꾸는 세상은 진심이 잘 전달되는 세상이다. 그가 말하길 현대인의 단골 멘트라고 할지 몰라도 나이가 들어가며 원했던 이상과 지독한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느끼고, 그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정의로운 행동이 필요하지만 이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세상이 된다고. "아이러니하게도 산다는 건 치욕과 모욕을 견디며 사는 게 아닐까. 그런데 이를 겪으며 괴물이 되어가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정의롭게 살고자 결심하지만 무너지기 쉽다"는 그였기에 '비스트'는 더 각별한 의미가 된 듯했다. 그는 영화를 보며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이를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참 보람 있을 것 같다"고 희망했다.

이처럼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감성을 지닌 유재명이다. 그는 첫 주연작이란 타이틀에도 그저 덤덤하다. 유재명의 기조는 "스스로 게을러지지 말자"는 것이다. 배우란 존재가 걸 수 있는 자기 주문은 그것밖에 없단다. 관성에 익숙해졌을 때 정신을 바짝 차릴 수 있게 욕을 잘해주는 사람이 필요할 것 같다며 웃어 보인다. 어쩜 이리 한결같다. 4년 전 '응답하라 1988'로 뒤늦게 유명세를 얻었을 때도 제가 변하면 후배들에 뒤통수를 때리라 했다며, 자신이 변해갈 때 누군가 진지하게 일깨워준다는 것이 고마운 복이라 말했던 그였다. 참 변함없이 연기에 대한 멋을, 배우에 대한 낭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유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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